Ultra Small Movement
예거 르쿨트르 칼리버 101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극한의 얇기를 실현한 무브먼트 혹은 시계를 울트라-슬림, 울트라-신이라 부른다.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이것은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다른 무브먼트보다 두께를 훨씬 얇게 만들기 위해 플레이트를 포함한 모든 부품의 두께를 억제해야 한다. 다른 의미로는 충격과 내구성에서 매우 적절하며 새로운 지점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구조적으로는 부품 위아래 공간이 크게 줄어들어 유격, 조립 단차에서 허용 여유가 사라진다. 극단적인 경우 플레이트를 규정보다 아주 조금만 더 강하게 조여도 부품이 움직이지 못한다. 전통적인 울트라 슬림은 말 그대로 극단의 얇기를 구현하기 위해 기능을 배제한 타임 온리로 귀결되어왔다. 가장 기본적인 시·분침만 갖춘 시계에 가공과 조립 난이도에 따른 추가 비용을 더하는 것은 울트라-신의 미학을 온전히 이해한 소비자에게만 받아들여졌다. 그 때문에 울트라-슬림은 하이엔드 브 랜드가 기술적 경이를 구현하는 장이 되곤 했지만, 크로노그래프 같은 직관적 인 기능이 활약하는 큰 무대로 발전하기는 쉽지 않았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울트라-슬림의 개념을 깨고 컴플리케이션을 필두로 한 여러 기능을 가장 얇은 두께에 담는 도전을 통해 무대를 확장해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고자 한다.
울트라-슬림이 두께를 정복하는 도전이라면 소형 무브먼트는 최소 지름에 대한 도전이다. 하지만 울트라-슬림 같은 멋진 이름을 가지지 못했고 장르도 형성하지 못했는데, 울트라-슬림과 기술적 접근이 다소 달랐던 것이 이유다. 두께를 최대한으로 덜어내는 울트라-슬림과 달리 소형 무브먼트는 지름을 억제하는 대신 두께가 두꺼워지거나 별도의 부품을 취하는 형태로 흘렀다. 극한의 두께가 불러온 기술적 성취나 시각적 우아함과도 거리가 있었다. 또 소형 무브먼트의 활동도를 고려하면 주로 여성용에 적합하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다. 최근 전반적으로 시계 지름이 과거보다 커진 덕분에 여성용 시계에도 남성용 무브먼트를 탑재하는 추세라 소형 무브먼트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작은 지름이 주는 아기자기한 재미를 추구하는 수요와 여성용의 활용을 통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ETA 칼리버 2000
스와치 그룹 산하의 무브먼트 제조사 ETA는 주력 자동 무브먼트인 칼리버 2892와 2824보다 지름이 작은 칼리버 2000을 라인업에 올려두었다. 현재는 생산을 중단한 듯하나 지름 19.4mm, 두께 3.6mm의 자그마한 자동 무브 먼트는 쟁쟁한 두 형제만큼은 아니지만 활발하게 활약했다. 보통 지름이 작은 무브먼트는 공간의 제약상 기어트레인 배치 같은 구조에서 유사한 면이 있고, 레이아웃이 다소 답답한 부분도 보이지만 칼리버 2000은 상대적으로 지름이 큰 편에 속해 시원스러운 레이아웃을 드러낸다. 지름이 작지만 파워 리저브는 45시간으로 넉넉한 편이며 기본적으로 데이트 기능을 구현했다. 기능 베리에이션에 해당하는 칼리버 2094는 칼리버 2000을 베이스로 트리컴팩스 배치의 크로노그래프다. 이것은 소형 무브먼트로 크로노그래프를 구현해 지름이 작은 시계에서 자동 크로노그래프를 즐기도록 했다.
무브먼트 제조사 ETA의 칼리버 2000
칼리버 2000은 작은 지름을 이용해 작은 원형 시계와 사각형(스퀘어) 혹은 직사각형(렉텡귤러) 같은 비원형 시계에 탑재되었다. 사각형 같은 각형 시계에서 솔루션이 부족한(드물게 케이스 형태에 맞춰 원형 플레이트를 각형으로 변형한 경우도 있다) 자동 무브먼트 장착이라는 문제를 칼리버 2000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까르띠에 칼리버 120을 탑재한 탱크 프랑세즈 라지
칼리버 2000의 사각형 혹은 직사각형 케이스 탑재는 까르띠에에서 도드라졌다. 까르띠에는 남성용 시계에서 여성용과 달리 기계식 무브먼트를 탑재하는 비율이 높은 편이다. 모델에 따라서는 기계식, 쿼츠식이라는 선택지를 주기도 한다. 탱크 아메리칸은 웅장한 뉴욕의 마천루를 이미지화한 듯 세로가 길고 볼드한 브랑카르즈(Brancards)를 드러내는 렉텡귤러 케이스를 택했다. 1990년대 등 장한 탱크 아메리칸 Ref. 1725는 22.5mm의 짧은 가로 길이로 무브먼트 탑재가 극히 제한적이었으나 칼리버 2000 덕분에 데이트 기능을 구현할 수 있었다. 칼리버 2000은 까르띠에에서 큰 수정 없이 칼리버 120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했으며, 남성용으로는 지름이 작은 탱크 프랑세즈 라지 같은 스퀘어 케이스에서도 대활약했다.
브레게 칼리버 586 / 블랑팡 칼리버 615
브레게 레인 드 네이플 8918 / Ref. 8918BB/28/964/D00 / 지름 28.45mm 케이스 18K 화이트 골드 / 무브먼트 칼리버 537/3 / 기능 시, 분 / 다이얼 그랑 푀 에나멜 다이얼 / 스트랩 블루 악어 가죽 스트랩
브레게의 대표적인 여성용 라인 레인 드 네이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칼리버 586은 지름 6 3/4리뉴(ligne), 즉 약 15.7mm의 작은 원형 자동 무브먼트다. 레인 드 네이플의 오벌 케이스는 위아래로 비대칭이며 무브먼트를 케이스 하단에 배치하기 때문에 무브먼트 탑재에 제약이 있다. 또 여성용이라는 점 때문에 케이스가 작고 실제로 Ref. 8928 같은 가장 소형 모델의 가로는 약 25mm에 불과해 흔히 쓰이는 자동 무브먼트의 지름보다 작다. 칼리버 586은 지름 15.7mm로 밸런스 휠과 배럴의 거리가 극단적으로 가깝고 두께감이 있는 소 형 무브먼트 특유의 구성을 보이지만, 파워 리저브가 38시간으로 준수한 구동 시간을 확보했다. 파워 리저브는 메인 스프링의 길이에 비례하며, 배럴 지름과도 비례한다. 긴 파워 리저브를 확보하려면 그만큼 큰 배럴이 필연적이고 무브먼트의 지름도 따라서 커진다. 이 법칙에 기반한 칼리버 586의 지름에 따른 파워 리저브는 배럴의 지름과 그 내·외부 공간을 잘 활용했다. 하이엔드 브랜드 답게 칼리버 586은 6포지션 조정과 실리시움 헤어스프링을 사용해 준수한 성능을 예상케 한다.
블랑팡 레이디버드 컬러즈 / Ref. 3660-1954-V55A / 지름 34.9mm / 케이스 화이트 골드 / 무브먼트 칼리버 1153 / 기능 시, 분, 초 / 다이얼 화이트 머더오브펄 / 스트랩 앨리게이터
최근 블랑팡은 여성용 레이디버드(Ladybird) 라인을 론칭했는데, 그중에서도 지름이 작은 레이디버드 엑스트라 플랫은 케이스 지름이 21.5mm에 불과하다. 이 모델에는 소형 자동 무브먼트 칼리버 615를 탑재해 시간과 날짜를 표시한다. 블랑팡의 칼리버 615와 브레게의 칼리버 586은 베이스 무브먼트가 동일하며 스펙시트의 모든 수치 또한 같다. 브레게와 블랑팡이 무브먼트 라인업 일부를 공유하던 흐름은 점점 감소하고 있으나, 생산량이 적은 여성용에서는 일부를 공유해 효율을 꾀하고 있다(브레게는 레인 드 네이플 Ref. 8928보다 큰 Ref. 8918에 8 3/4리뉴의 칼리버 537을, 블랑팡은 레이디버드에 남성용인 칼리버 1153을 탑재한다).
블랑팡 레이디버드 컬러즈 칼리버 1153
예거 르쿨트르 칼리버 101
예거 르쿨트르 칼리버 101
소형 무브먼트의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형태이자 돋보이는 무브먼트는 칼리버 101이라 할 수 있다. 1929년 예거 르쿨트르가 발표한 칼리버 101은 앙리 로다네(Henri Rodanet)가 고안한 듀오플랜(Duoplan)을 소형화한 수동 무브먼트다. 앙리 로다네를 고용하면서 예거 르쿨트르가 인하우스 무브먼트화한 듀오플랜은 기어트레인 레이어(플레이트)와 밸런스 휠 레이어를 겹쳐 만든 구조(배럴은 두 레이어에 샌드위치된다)를 가장 큰 특징으로 꼽는다. 이름 또한 이 독특한 구조에서 기인하며, 듀오플랜의 수직 복층 구조로 크기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울트라-슬림이 두께를 줄이기 위해 부품을 수평으로 늘어놓아 지름을 늘리는 것과 반대되는 접근으로 지름을 줄이기 위해 수직 복층화했다고 볼 수 있다.
예거 르쿨트르 101 뱅글 / Ref. Q2892201 / 지름 18.35×5.98mm / 케이스 화이트 골드 / 무브먼트 칼리버 101 / 기능 시, 분 / 다이얼 실버 오팔린 / 스트랩 핑크 골드, 996개의 다이아몬드(19.7캐럿)를 세팅한 브레이슬릿
예거 르쿨트르는 듀오플랜의 구조를 바탕으로 여러 무브먼트 베리에이션을 만들어냈고, 가장 소형화한 무브먼트가 칼리버 101이다. 이는 세로 14mm, 가로 4.8mm로 세로 길이는 소형 원형 무브먼트보다 1~2mm가량 작은 수준이나 가로 길이가 4.8mm에 불과하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무브먼트로 불리는 만큼 활용도가 높다. 특히 칼리버 101이 등장한 시기는 아르데코 사조가 중심에 있어 바게트형 칼리버 101은 물을 만난 물고기와도 같았다. 특히 여성용 브레이슬릿 형태의 시계에 극히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고, 무브먼트의 존재를 감추는 형태도 가능했다. 칼리버 101은 현재 그 특별함을 무기로 현존하는 무브먼트 중 손꼽을 정도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한편, 예거 르쿨트르의 하이 주얼리 워치에서 작지만 커다란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불가리 칼리버 BVL100 피꼴리씨모(Piccolissimo)
LVMH 워치 위크 2022에서 발표한 세르펜티 미스터리오시 하이 주얼리 시크릿 워치는 불가리 여성용 시계의 대표작인 세르펜티의 최신 베리에이션이다. 뱀의 입속에 시계를 넣은 구조로 입을 여닫아 시계를 가릴 수 있어 시크릿 워치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이 모델에는 불가리가 새롭게 개발한 소형 무브먼트 칼리버 BVL100 피꼴리씨모를 탑재한다. 지름 12.3mm, 두께 2.5mm의 매우 작은 무브먼트로 자동이 아닌 수동이기 때문에 앞서 소개한 무브먼트에 비해 얇은 두께를 실현했다. 예거 르쿨트르의 칼리버 101 같은 바게트형 무브먼트 를 제외하면 원형 무브먼트 중에서는 지름이 가장 작다.
불가리 세르펜티 미스터리오시 하이 주얼리 시크릿 워치 / Ref. 103561(L) / Ref. 103560(R) / 지름 40mm / 케이스 화이트 골드 / 무브먼트 BVL100 피꼴리씨모 칼리버 / 기능 시, 분 / 다이얼 다이아몬드 파베 다이얼 / 스트랩 옐로 골드 또는 화이트 골드 더블-투어 브레이슬릿
칼리버 BVL100은 지름을 줄이기 위해 과거의 방식을 답습했다. 블랑팡이 1956년에 선보인 칼리버 R550은 지름 11.85mm로 가장 작은 지름이라는 기록을 세운 무브먼트로, 크라운을 무브먼트 측면이 아닌 브리지 위에 수직으로 연결하는 방식을 채용했다. 칼리버 BVL100 역시 브리지 사이로 노출한 2개의 휠 사이에 크라운 역할을 담당하는 수직 축을 두었다. 실제로 세르펜티 미스터리오시 하이 주얼리 시크릿 워치를 보면 크라운이 뱀의 입 아래쪽에 위치한다. 수직 구조를 일부 사용해 지름을 줄인 한편, 세르펜티 미스터리오시 하이 주얼리 시크릿 워치의 구조에 적합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칼리버 BVL100은 샌드 블라스트를 이용한 거친 느낌의 표면 가공과 브리지 테두리를 강조해 소형 무브먼트의 작은 지름 탓에 즐기기 어려운 피니싱의 아름다움도 놓치지 않았다. 다만 12.3mm라는 무브먼트 지름은 물리적으로 배럴 지름에 많은 공간을 할애하기 어렵게 했고, 이로 인해 파워 리저브는 30시간으로 짧다. 하지만 수동 무브먼트이기 때문에 뱀의 입 아래를 만져주는(와인딩) 것으로 구동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옥토 피니씨모 시리즈로 구축한 울트라-신에 이어 BVL100 피꼴리씨모로 소형 무브먼트에도 욕심을 내기 시작한 불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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