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ioneers of Pilot’s Watch
스포츠 워치 장르에 속하는 시계는 기능이 시계 전반을 결정한다. 익숙한 다이버 워치를 예로 들면 단단한 케이스, 스크루 다운 크라운, 역회전 방지 회전 베젤, 크고 뚜렷한 인덱스를 갖춘 시계라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다이버가 잠수 시 필요한 조건에 따라 구성되어 시계의 특징적인 요소가 되었다. 스포츠 워치에서 다이버 워치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하는 파일럿 워치는 비행기를 조종하는 파일럿의 필요에 따라 완성된 시계다.
파일럿이 요구하는 기능은 디테일과 디자인에 반영되었고, 다른 장르와 구분되는 특징적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파일럿 워치의 시작은 비행기의 역사와 궤를 함께한다. 비행기가 등장한 후 곧 파일럿 워치가 등장했고, 비행기의 발전에 맞춰 파일럿 워치도 더불어 발전했다. 파일럿 워치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은데, 기록에 남아 있는 내용을 토대로 본다면 비행을 위해 사용한 시계라는 관점에서 까르띠에의 산토스 워치를 꼽을 수 있다. 1904년 첫 선을 보인 산토스 워치는 브라질 출신 모험가이자 파일럿 산토스 뒤몽이 친구인 루이 까르띠에에게 의뢰하며 탄생했다. 사실 이 모델은 파일럿 워치보다 손목시계의 시작점으로 꼽는 경우가 많다. 비행 시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 시계를 손목에 매달아 쓰고 싶다는 요청에 따라 만든 시계로, 손목시계의 형태로 귀결했기 때문이다. 루이 까르띠에는 산토스 뒤몽의 요청 사항을 시계 디자인으로 구현했다. 회중시계와 손목시계를 구분하는 요소 중 가장 명확한 부품인 러그(lug)를 시계 디자인에 자연스럽게 녹여내 스트랩을 연결할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산토스 뒤몽은 열기구나 비행기를 조종할 때 회중시계를 꺼내 보는 불편함 대신 손목 위 시계로 빠르게 시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이것은 손목시계의 원점으로 자주 언급되지만 파일럿 워치가 갖춰야 할 기능적 혹은 디테일 요소를 갖추지는 못했다.
산토스 뒤몽 Archives Cartier © Cartier
까르띠에 산토스 뒤몽 워치
루이 까르띠에가 디자인한 산토스 워치의 시계사적 의의는 러그를 고안하고 그 기능을 명확하게 해 손목시계 디자인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즉 회중시계를 손목에 착용하기 위해 와이어를 땜질하고 스트랩을 엮어 사용했던 간이 손목시계에서 정식(?) 손목시계로 이행하도록 표준적 방식을 보여준 것이다. 첫 산토스 워치의 러그 라인은 케이스에서 자연스럽게 연장되어 스트랩을 연결하도록 디자인되었는데, 요즘 기준으로 본다면 다소 소극적으로 보일 정도로 작았지만 기능적으로는 충실했다.
1912년 산토스 워치 Vincent Wulveryck, Collection Cartier © Cartier
산토스 워치는 1904년 첫 선을 보였지만 시판용은 1911년부터 등장해 지금에 이른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산토스 워치는 다양한 케이스 사이즈, 쿼츠와 기계식 무브먼트 등의 선택지를 제시한다. 정사각형 다이얼에는 로만 인덱스와 레일웨이 미닛 인덱스를 올렸고, 이를 곡선 케이스가 둘러싸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산토스 워치가 처음 보여준 디테일은 변함이 없다.
2020년 ‘Le 14 Bis’ 산토스 뒤몽 워치 Laziz Hamani © Cartier
2019년 전반적인 리뉴얼을 거친 산토스 뒤몽 워치는 2020년 리미티드 에디션을 통해 산토스 뒤몽의 비행 업적을 기렸다. 케이스 소재별로 한정 수량을 생산한 에디션으로, 그가 비행에 도전하기 위해 탑승했던 비행기와 열기구를 케이스 백에 담아냈다. 특히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에 골드 베젤을 얹은 산토스 뒤몽 ‘Le14Bis’ 워치는 그가 1906년 11월 12일 220m의 비행에 성공한 업적을 보여준다. 유럽 최초로 동력 비행기를 통한 비행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게 해준 비행기 ‘Le 14 Bis’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500개 생산되어 현재는 신제품으로는 구할 수 없다. 산토스 뒤몽의 또 다른 업적을 기린 골드와 플래티넘 소재의 리미티드 에디션 역시 구하기 어려운 것 은 마찬가지다. 산토스 뒤몽 워치의 매력적인 요소에 비행의 역사를 담아낸 디테일이 누구에게나 매력적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제니스 파일럿 타입 20 크로노그래프 실버
파일럿 워치 디테일의 제시
제니스는 일찍이 파일럿 워치를 제조한 회사다. 하지만 놀랍게도 2009년 장- 프레데릭 뒤포(Jean-Frédéric Dufour)가 CEO로 취임하기 전까지 파일럿 워치를 만들지 않았다. 제니스가 파일럿 워치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것은 인류가 하늘을 날기 위해 걸음마를 시작한 1900년대 초반이다. 프랑스의 항공 기술자이자 파일럿 루이 블레리오(Louis Blériot)는 1907년 처음으로 단엽기 를 제작했다. 무수한 실험 비행에서 많은 비행기를 부숴 파괴왕이라는 별칭이 붙었지만, 이를 토대로 1909년 블레리오 11호를 타고 프랑스 칼레에서 영국 도버까지 37분을 날아 영국해협 횡단에 최초로 성공한다. 이때 블레리오는 제니스가 제공한 시계를 착용했고, 그 성능에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블레리오와 영국해협을 비행한 시계는 파일럿 워치에 요구되는 기능성을 제시했다. 산토스 뒤몽 워치처럼 러그를 장착해 손목에 착용할 수 있었고, 다이얼에는 크고 뚜렷한 아라빅 인덱스를 올렸다. 커시드럴 핸즈에는 야광 물질을 도포해 가독성을 고려했으며, 케이스 지름 대비 크고 긴 크라운을 달아 장갑을 끼고도 조작 가능했다. 이러한 디테일은 훗날 파일럿 워치를 정의하는 기능적 요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니스는 파일럿 워치의 기능적 디테일을 제시하는 한편, ‘Pilot’을 상표등록해 현재 유일하게 다이얼에 파일럿 문구를 명기할 수 있는 회사다. 이렇듯 항공사와 시계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지만 오랜 기간 파일럿 워치를 만들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제니스 파일럿 타입 20 크로노그래프 실버
제니스 파일럿 타입 20 크로노그래프 실버
2021년 케이스에 은을 사용한 2개의 모델이 등장했다. 하나는 튜더의 블랙 베이 피프티에잇 925이고 다른 하나는 제니스 파일럿 타입 20 크로노그래프 실버다. 둘 모두 스털링 실버를 케이스 소재로 사용해 은은한 색감과 함께 브론즈 케이스처럼 시간의 흐름과 사용감에 따라 나타나는 표면 변화를 즐길 수 있다. 실버 케이스로 주목받았지만 파일럿 워치답게 비행기의 디테일을 충실하게 묘사했다. 가장 정성을 쏟은 부분은 다이얼로, 비행기의 동체를 옮겨온 듯하다. 다이얼에는 표면을 브러시드 처리한 여러 장의 패널과 리베팅(rive- ting)을 묘사해 단번에 비행기를 모티브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실버 케이스의 표면 변화와 어우러지면서 앞으로 더욱 멋진 모습으로 바뀌리라 기대할 수 있다. 지름이 45mm인 케이스는 남성적이며 호쾌하지만 워치에 탑재한 칼리버 엘 프리메로 4069의 지름과는 다소 괴리가 있다. 타입 20의 요건인 가로 투 카운터를 3시와 9시 방향에 배치해 커다란 인덱스의 일부를 가리지 않지만 중앙으로 쏠려 있다. 케이스 지름이 크기 때문에 더욱 도드라지는데, 이 점을 제외한다면 전반적으로 매력적인 구성의 파일럿 워치다. 칼리버 4069는 1969년에 탄생한 자동 크로노그래프를 베이스로 하지만 거듭된 수정과 개량을 거쳐 40시간 초반의 파워 리저브를 50시간으로 늘렸고, 당시로서는 고급 크로노그래프의 요건에 해당하는 칼럼 휠을 사용해 크로노그래프를 조작하는 재미를 제공한다.
빈티지 항공기에서 영감받은 제니스 파일럿 타입 20 크로노그래프 실버
파일럿 워치의 기능적 발전
제1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꿀 새로운 전쟁 무기로 탱크가 등장했지만 기대(?)와 달리 활약상은 시원치 않았다. 이 무렵 비행기는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전장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다. 하늘 높이 날며 먼 거리의 상황을 확인하는 정찰 임무에 한정되었고 비행기끼리 맞붙는 공중전 개념이 막 생겨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전 세계를 화마로 뒤덮은 전쟁이 끝을 맺었지만 비행기는 발전을 거듭한다. 1927년 미국의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는 대서양 횡단에 성공하며 항공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미국 롱아일랜드에서 이륙한 스피릿 오브 세인트 루이스호가 약 3,600마일을 33시간 30분 동안 쉬지 않고 비행해 프랑스 파리에 착륙한 것이다.
1938년 론진의 광고에는 2개의 시계가 지면을 크게 차지했다. 윔즈 (Weems) 워치와 아워 앵글(Hour Angle) 워치다. 두 모델의 개발에는 미 해군 대령이던 필립 반 혼 윔즈(Philip van Horn Weems)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윔즈는 20세기 현대 항법의 개척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항법의 개발과 도입은 당연했다. 1900년대 초반 하늘에 도전했던 위대한 선구자들은 파일럿이었지만 체계적인 항법에 따라 하늘을 비행한 것은 아니었다(물론 그리 긴 시간을 날지도 못했다). 어찌보면 무모한 혹은 낭만적인 모험가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항공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조차 정확한 비행 방향을 파악하고 날지 않았으니 말이다.
윔즈는 1933년 해군에서 퇴역한 후 최신 비행 항법을 가르쳤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이 찰스 린드 버그다. 윔즈 워치와 아워 앵글 워치는 당시 크로노미터 제조사 중 하나였던 론진이 탄생시켰고, 항공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윔즈와 린드버그라는 인물이 그 배경에 자리한다. 윔즈 워치가 등장한 이유는 당시 시간을 조정하기 위해 크라운을 당기는 순간 초침이 멈추는 핵(hack) 기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초침을 원하는 대로 제어할 수 있는 시계를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항법에 있어 불과 수 초의 오차는 목표 지점으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윔즈는 초 단위의 정확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시보와 초침을 일치시키는 방법을 고안한다. 멈추지 않는 초침 대신 세컨드 인덱스를 올린 작은 다이얼을 돌려 시보와 초침을 일치시키는 아이디어였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초를 시보와 완전하게 동기화 할 수 있었고 핵 기능과 달리 무브먼트에 가해지는 기계적 충격도 피할 수 있었다. 초침을 읽을때는 이동한 작은 다이얼의 눈금에 맞춰 읽기만 하면 되었다.
찰스 린드버그
윔즈 워치와 함께 파일럿 워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워 앵글 워치는 경도를 파악하기 위해 만든 시계다. 린드버그가 개발에 참여한 모델이기도 하다. 북극성의 위치를 보고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위도와 달리 경도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천측력(almanach), 육분의(sextant), GMT 시간의 확보, 정확한 시간을 표시하며 시간각(hour angle)을 측정할 수 있는 아워 앵글 워치가 필요하다. 아워 앵글 워치의 특징은 전적으로 기능에 따라 결정되었다. 베젤과 다이얼에는 균시차(equation of time)와 시간각을 파악할 수 있는 인덱스를 올렸다. 윔즈 워치와 마찬가지로 다이얼 중앙의 작은 다이얼을 돌려 초침을 시보와 동기화할 수 있었다. GMT의 시간각, 현재 위치의 시간각을 아워 앵글 워치를 이용해 측정하면 경도를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시계가 항법에 필요한 기능을 갖추며 특징적 형태로 발현됐고, 동시에 파일럿 워치의 기능도 발전이 이뤄졌다.
론진 윔즈 세컨드 세팅 워치
윔즈 워치는 몇 개의 프로토타입을 미국에서 제조했고, 론진이 본격 생산하면서 시대에 따라 몇 가지 다른 형태로 등장했다. 현재 론진의 라인업에는 오리지널 모델을 기반으로 복각한 모델이 자리를 지킨다. 윔즈 워치는 최초에 회중시계 무브먼트를 장착해 케이스 지름이 47.5mm에 달했다. 회중시계 무브먼트는 손목시계로 전환됨에 따라 점차 소형화되었다. 1940년대에는 손목시계용 소형 무브먼트가 보급되어 시계 케이스의 지름이 줄었고, 윔즈 워치도 이에 맞춰 작은 지름으로 변화했다. 다이얼 속 스몰 다이얼을 조작하는 디테일을 개선해 미닛 인덱스를 새긴 베젤을 직접 돌리는 방식을 택해 더욱 신속한 초침 동기화가 가능해진다.
론진 윔즈 세컨드 세팅 워치
현재의 윔즈 세컨드 세팅 워치는 여러 베리에이션으로 만들어지다 2007년 바젤월드에서 윔즈 워치 탄생 80주년을 맞이해 본래 형태로 돌아갔다. 케이스 지름 역시 47.5mm의 커다란 사이즈로 복귀했으며, 수동이 아닌 대형 사이즈의 자동 무브먼트를 탑재했다. 양파 모양의 큼직한 크라운과 그 아래에 위치한 록 디테일을 포함, 윔즈 워치의 핵심인 세컨드 세팅용 스몰 다이얼까지 완전하게 복각되었다. 래커 처리한 화이트 다이얼은 블루 스틸 핸즈와 만나 뚜렷한 대비로 높은 가독성을 제공한다. 케이스 백은 보기드문 헌터 백 방식을 택해 케이스 두께가 15.6mm에 달한다. 물론 케이스 지름과 두께간 비율을 고려한다면 나쁘지 않은 수치지만, 절대적인 수치상 크게 두꺼워 일상에서 착용하기에는 다소 부담이 따른다.
론진 린드버그 아워 앵글 워치 90주년 한정판
론진 린드버그 아워 앵글 워치
윔즈 세컨드 세팅 워치와 같은 47.5mm 지름으로 생산되고 있는 린드버그 아워 앵글 워치 또한 오리지널 케이스 지름으로 회귀했다. 30mm 초반의 작은 지름으로도 생산된 적이 있으나 2017년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90주년을 맞이한 이후 지름이 47.5mm인 모델이 라인업을 차지하고 있다. 윔즈 워치와 마찬가지로 초침을 시보와 동기화하기 위한 스몰 다이얼을 갖췄으며, 기능상 훨씬 복잡한 구성을 드러낸다. 아워 앵글 워치의 핵심인 시간각 측정을 위해 추가적인 디테일을 갖추어야 했는데, 스몰 다이얼에는 세컨드 인덱스 외에 15개로 균일하게 분할한 인덱스를 추가로 올렸다. 이는 좌우로 회전하는 베젤에 새긴 커다란 아라빅 인덱스와 동일한 배치를 띤다. 베젤에 새긴 1에서 15까지의 각 숫자 사이에 작게 15, 30, 45를 넣었다. 즉 균시차를 초까지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적 디테일이다. 스몰 다이얼의 바깥쪽에는 다이얼을 15도 단위로 분할한 인덱스를 아워 인덱스 하단에 병기했다. 아워 앵글 워치가 시간각을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를 다이얼과 베젤 디테일로 구현하도록 한 것이다. 제니스의 초기 파일럿 워치가 가독성, 조작성 같은 요소를 제시했다면 론진의 윔즈 워치와 아워 앵글 워치는 항법과 관련된 심도 깊은 기능성에 초점을 두었다. 현행 린드버그 아워 앵글 워치는 자동 무브먼트 칼리버 L699를 탑재해 높은 기능을 구현하고, 래커 다이얼을 사용해 기능적 디테일을 더욱 부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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